활동소식

작은 기적의 의미와 향후 법 집행의 방향

  • 장추련
  • 2007.03.23 20:5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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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차별금지법 국회통과,

작은 기적의 의미와 향후 법집행 전망

- 집행기구의 인력보강으로 진정성을 입증하기를 기대한다 -

 

 

장애계의 오랜 숙원이 성취됐다. 지난 3월 6일자로 장애인차별금지법이 드디어 국회를 통과한 것이다. 맨땅에 헤딩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입법운동을 시작한지 7년 만의 경사다. 장애계가 이 법안에 걸었던 희망과 기대와 이 법안에 쏟은 정성과 노고를 잘 아는 나로서는 이 작은 기적 앞에 눈시울과 가슴이 젖어드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보탠 게 없는 나도 이렇게 감격스러울진대 직접 뛰어다닌 장애당사자들은 얼마나 감개무량할 것인가.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어느 정당도 장애계의 정당하고 절실한 요구를 뿌리칠 수 없었던 것 아니냐’며 이 법의 제정을 폄하하는 일부 시선이 있는 것도 안다. 하지만 장애차별금지법은 가지 많고 바람 많은 장애계가 처음부터 초계파적 추진연대(장추련)를 결성하여 끝까지 단일대오를 유지하며 힘차게 투쟁한 끝에 쟁취한 그야말로 눈물과 땀의 결정체다. 

   

이번에 통과된 법안은 내용 면에서 장애계의 원안보다는 많이 약화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 법안은 한국 장애인권운동의 금자탑이요 기념비로 조금도 손색이 없다. 장추련의 원안은 장애계가 발과 눈물로 쓴 통한과 열망의 법안이었다. 장애차별을 경험한 생활세계를 무려 17개 영역으로 세분한 후, 각각의 영역에서 명백한 차별행위로 금지할 행위유형과 특별한 반증이 없는 이상 차별행위로 간주할 행위유형을 꼼꼼하게 열거한 것이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다.


장애계 원안의 관련 조항들은 지금까지 전 세계가 목격한 어떤 장애차별법보다도 상세하고 강력했다. 모든 후발입법이 그렇듯이 호주, 뉴질랜드, 영국, 미국 등의 선행법제를 두루 참고해 만들었지만 장애계 내부의 무수한 토론과 심의를 거쳐 한국 장애인의 생생한 차별경험을 구체적인 법조문으로 일일이 녹여냈다는 점에서 드물게 보는 독창적인 국적 법안이었다.


이 법안이 국회에 제출된 후 국회와 정부는 약속이나 한 듯이 국가인권위에 짐을 넘겼다.  장차법안에 대해 인권위가 어떤 입장을 내놓느냐에 따라 입법전망이 달라지는 국면이 왔다. 종종 전투적 운동방식도 마다지 않는 장애계는 60일 넘게 점거농성을 지속하며 인권위를 압박했다.


인권위는 이미 2003년부터 여러 개의 부문별, 사유별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대신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하나만 제정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결론짓고 법안 기초에 매달린 끝에 이제 공개시점만 저울질하던 시점이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명색이 인권위란 데가 장애계가 그토록 열망하는 장차법안을 반대하는 건 모양이 사나왔다. 그렇다고 장차법안을 지지하면 자칫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구상이 물 건너갈 가능성이 높았다. 더욱이 독립 성차별금지법과 인종차별금지법 제정요구는 어떻게 막을 것이며 독립 성차별위와 인종차별위 설립요구는 어떻게 막을 것인가. 참으로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었다.    


인권위가 성안해서 내놓은 통합 차별금지법안은 겉으로 보면 하나의 법안이지만 실제로는 인권위가 장애차별금지법안, 성차별금지법안, 인종차별금지법안 등 19개의 사유별 차별금지법안을 동일한 내용으로 만들어낸 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당장 절실한 건 인권위가 내놓은 ‘장차법안’과 장애계의 장차법안이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를 최대한 꼼꼼히 비교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당시 유엔에서는 장애인권리협약안이 성안 마무리 단계에 와 있었으므로 장애계의 장차법안과 인권위의 장차법안을 장애인권리협약안의 내용에 비춰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하면 장애차별을 실효적으로 금지하는 데 필요한 입법사항 중 장애계의 장차법안에 규정돼 있고 장애권리협약에 예정돼 있지만 인권위의 (장애)차별금지법안에는 일반법의 성격상 담아내지 못한 내용이 드러날 것으로 확신했다. 과연 그랬다.


06년 5월 인권위는 장애계의 장차법안은 인권위의 차별금지법안과 논리적으로 배척되는 것이 아니며 인권위의 차별금지법안이 담지 못한 필요한 입법사항을 담고 있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장애계의 장차법안에 청신호를 보낸 것이다. 인권위와 장애계의 오랜 현안은 그 순간 눈 녹듯 해소됐다. 청와대도 기다렸다는 듯이 관련당국과 장추련을 함께 불러 장차법안의 주요쟁점을 정리해 나갔다. 여기서 나온 안이 열린우리당 법안이다. 이번에 통과한 것은 이것을 몸통 삼아 약간의 수정이 가해진 법안이다.  


입법운동 막바지에 장애인권리협약이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것도 입법운동에 도움이 됐다. 06년 12월에 탄생한 이 여덟 번째 국제인권조약은 성안작업 개시 3년 만에 유엔총회를 통과하는 일대 이변을 일으켰다. 우리 장애계는 장애여성과 장애아동에 관한 특별조항 채택을 제안하여 성사시켰다. 장애인권리조약의 공식 채택은 장차법 제정운동에 다시 한 번 확신을 부여했다. 국회와 정부에도 장차법 제정의 불가피성을 이해하는 하나의 계기로 작용했다.  


장차법에 따르면 장애차별의 조사와 구제는 인권위의 권한이다. 정확하게는 인권위에 장애차별소위를 신설해서 맡기게 돼 있다. 인권위는 현재의 차별소위 위원들이나 상임위원들로 장애차별소위를 구성하거나 이 분야에 특별한 관심과 열정이 있는 위원을 골라 구성하는 방안 중 하나를 고르게 될 것이다. 


장애차별소위보다 바람직한 기구 형식은 현재 임의적 심의기구에 지나지 않는 장애차별전문위원회를 장애차별사안에 관한 필요적 의결기구로 격상하여 장애차별특위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사자 전문가와 외부전문가들로 구성하되 인권위원이 위원장을 맡는 장애차별특위에서 1차적으로 장애사안에 대해 결정권한을 갖되 특위결정에 대해서는 당사자가 이의신청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인권위(전원위)가 최종판단을 내리는 그런 2심 구도가 어떨까 싶은 것이다.


이런 2심제 결정구조 아래서는 장애계의 전문성과 대표성, 그리고 당사자성을 보다 용이하게 반영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인권위에는 지금까지 장애계의 대표성과 전문성을 가진 인권위원이 전무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돼도 이러한 상황이 당장 바뀌는 건 아니다. 인권위원 3인으로 구성되는 장애차별소위는 전문성과 대표성에서 여전히 문제될 소지가 없지 않다.  


나는 인권위 사무총장으로 부임할 때부터 장차법 문제를 놓고 엄청나게 고심했다. 내 마음에는 처음부터 분명한 답이 있었다. 별도의 입법은 바람직하지만 별도의 기구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장애차별의 조사와 심판, 그리고 구제를 담당할 장애전문기구에는 반드시 장애계의 당사자성과 대표성, 그리고 전문성이 확보돼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으로 장애차별전문위원회와 장애차별조정인단을 신설하여 위원회 차원에서 장애인권에 대한 전문성과 당사자성을 대폭 보강했다. 이어서 사무처에는 직제개편을 단행할 때 장애차별시정팀을 신설했다. 과거에는 2인의 조사관이 배정됐을 뿐인 업무를 일개 팀의 소관사항으로 확대한 것이었다.


일단 필요한 응급조치를 취한 셈이지만 장애계의 불만과 불신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장추련은 인권위는 시정명령권한도 없고 전문성과 감수성도 떨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독립 장애차별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나마 가시적인 땜빵 조치를 해놓은 덕분에 장애계의 비난강도가 약화된 것은 사실이다. 정부는 차별시정기능을 인권위로 일원화한다는 대통령의 04년도 방침 때문에 처음부터 독립 장차위에는 찬동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안심할 건 못 됐다.  


장애계의 희망대로 독립 장차위가 만들어질 경우 행정인력을 포함해서 최소한 6,70명의 인력이 추가로 소요되겠지만 그만큼 장애인권 보장이 큰 탄력을 받을 것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독립 장차위를 반대한 이유는 첫째, 인권위에 필요 인력을 보강해 주는 대안에 비해 인력과 예산의 낭비적 요소가 크다; 둘째, 장애차별위원회가 신설될 경우 성차별위원회와 고용차별위원회 등의 신설도 막을 명분이 없다; 셋째, 이렇게 되면 지금의 통합 인권위는 빈껍데기만 남는다; 넷째, 이 경우 인권보장체제에 구심점과 통합력이 사라지기 때문에 국가의 인권보장기능이 전체적으로 약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련의 논거에 내부자의 논리, 곧 기관이기주의가 묻어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낼 수 있다. 나도 늘 이런 가능성을 경계했다. 그러나 인권위의 바람직한 위상과 조직에 관한 나의 비전은 오래 전부터 분명했다. 그것은 여성인권, 장애인권, 형사인권, 인권교육 등 전문 인권분야마다 1심 전문특위를 둔 2심제 통합인권위였다. 나는 또한 다양한 인권분야에 발맞춰 내부적으로 특화되고 분권화된 2심제 통합인권위는 헌법기관의 위상이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왔다.


아무튼 전문분야에 따라 분화되고 헌법기관의 지위를 가진 2심제 통합인권위 비전은 현재의 중앙집권적인 1심제 법정기관 통합인권위에 대한 내 나름의 대안으로 발전돼 온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이 대안적 비전만이 통합인권위의 역사성과 효율성을 살려내는 동시에  통합인권위의 전문성과 대표성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내 생각과 상관없이 장애계가 독립기구 설치에 욕심을 내는 건 백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독립 장차위 설립에 반대한 이유는 같은 조건이라면 인권위 보강 방안이 훨씬 현실적이고 효율적이라는 데 있지, 장애인권 업무를 지금의 인권위처럼 고작 5인의 직원으로 구성된 1개 팀과 장애인권 문제에 대해 특별한 전문성과 대표성을 갖고 있지 못한 11인의 인권위원(혹은 3인의 소위 위원)에게 맡겨놓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결단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인권위 사무총장 시절 조영황 위원장의 결심과 지휘를 받아 장애차별전문위와 장애차별조정인단을 구성한 데 이어 장애차별팀을 장애차별본부(3개 팀)로 키우는 방안을 정부에 정식 제안한 바 있다. 통합인권위의 위상과 관할을 최대한 유지하되 통합인권위 내부구조를 과감하게 특화해야 한다는 나의 평소 지론 때문이었다. 


같은 연장선상에서 나는 새로운 장차법이 시행돼도 기존의 인권위원 3인으로 장애차별 소위가 만들어지는 것 외에 추가적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장애차별금지법 제정의 취지에 맞지 않는 법집행의 원천적 실패이자 중대한 왜곡이라고 단정한다. 독립 장차위 설립에 반대한 결과가 이렇듯 초라한 현상유지로 귀착될 경우 나는 장애계 앞에 면목이 없을 것 같다. 


내가 독립 장차위 설립에 반대한 이유는 오직, 신생 조직의 경우 최소규모로 발족해도 6,70명 이상의 인력이 소요되는 반면 인권위에는 장애차별 전담인력으로 일정한 수만 더 줘도 비슷한 업무효과를 낼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인권위에 이만한 정도의 규모와 범주의 경제(the economy of scale and scope)를 기대할 순 있어도 지금처럼 5명 1개 팀으로 독립 장차위 역할을 수행할 것을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인권위에 신설 장애차별법의 집행기능을 맡기기로 한 이상 정부는 꼭 필요한 인권위의 인력과 예산 보강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천신만고 끝에 손에 쥔 장애차별금지법이 생명력과 실효성을 발휘하는 데 필수적인 추가조치다. 장애차별금지법 제정의 진정성은 오직 이것으로 입증된다는 사실을 정부와 국회가 명심하기 바란다.         

             

      곽노현(방송대, 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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